퍼스트 포지션 – 2012년 11월 02일 18:45

퍼스트 포지션 – 2012년 11월 02일 18:45

기다리고 기다리던 퍼스트 포지션을 보고 왔다. 상영관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대학로까지 가서 보고 왔다. 발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재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재미는 있었다. 다큐에서 따라가고 있는 여러 학생들이 각각 다른 사정과 특징들을 가지고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 그리고 중요한 건 다들 잘 해서 발레 자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렇다고 해서 다큐멘터리로서 정말 뛰어나다고는 못하겠고 무난무난하다.

발레 지식이 전무한 번역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짜증은 돋우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발번역이다. 발레에 대해서 정말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번역을 한 것인지, 딱 봐도 전문 용어로 보이는 것들 외에는 이상하게 번역을 해 놓았다. 내역을 적어 놓으면 몇 개 안 되는데 바리에이션 같은 경우에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어서 체감 발번역 지수는 더 높았다. 그리고 중요도가 낮은 표현들도 아니었다. 어떻게 특정 분야의 사람들에 대한 다큐를 번역하면서 그 분야 전문가들에게 감수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발번역 1 : 바리에이션 -> 변주곡

‘바리에이션’을 ‘변주곡’으로 번역을 해놓았는데 이게 가장 많이 반복되었다. 클래식 음악 콩쿨도 아니고 무용 콩쿨에서 변주곡이 왜 나올까?! ‘바리에이션’은 그냥 ‘바리에이션’이다. 발레 용어 중 하나인 것이고 변주곡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느끼고 있는 어감을 글로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위키피디아의 ‘바리에이션 (발레)’ 영어  일본어 항목을 참고해 보면

솔로 댄스, 보통 전통적인 안무가 있어서 모든 무용수들이 같은 안무로 춘다. — 영문 위키
 
발레의 솔로 춤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중략) 파드듀와 같은 장면에서 솔리스트가 춤추는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중략) 모든 무용수들이 같은 안무로 춘다. — 일어 위키

거의 같은 내용인데 일어가 설명이 더 많다. 오페라의 아리아와의 비교가 적절한지 잘 모르겠지만. 일어 위키의 내용은 파드듀에 대한 언급때문에 비슷한 내용임에도 옮겨왔다. 그리고 Variation 항목에서 발레에서의 바리에이션으로 링크를 걸고 있는 곳에 있는 짧은 설명은 ‘솔로 춤 또는 무용 작품’이라고 되어있다.

위의 내용들을 정리해보면, 전통적 안무가 있는 솔로 작품을 바리에이션이라고 하고 무용 작품을 가리키는 경우에 쓰기도 한다. 하지만 무용 작품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안무가가 바리에이션이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쓴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이고 일반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참고로 그랑 파드듀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데 ‘아다지오-남자 바리에이션-여자 바리에이션-코다’ 순이다. 남녀가 만나고 – 남자가 춤추고 – 여자가 춤추고 – 마무리 하는 것이다. 이 때 파드듀를 추는 남녀 무용수가 혼자서 추는 춤을 바리에이션이라고 한다. 그래서 콩쿨에서 ‘~~ 바리에이션’이라면서 올라오는 작품들 중에는 그랑 파드듀 안에 있는 것이 많다.

발번역 2 : 턴아웃 -> 돌아서는 동작

발레에서 턴아웃은 포인과 함께 발레의 근간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중요한 것이다. 턴아웃이나 포인이 제대로 안 되면 뭘 해도 태가 안 난다. 그런데 그런 ‘턴아웃’을 ‘돌아서는 동작’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연습 장면에 대해서 선생님이 학생을 칭찬하는 장면이었는데 ‘턴아웃이 잘 되었다고’ 칭찬하는 것을 돌아서는 동작에 대한 칭찬으로 바꾸어 놓았다.

턴아웃은 발레에서 다리를 정면을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닌 바깥쪽으로 – 다리의 앞부분이 몸의 옆면 방향을 향하도록 – 돌린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동작이라기 보다는 상태이고, 고전적인 발레에서는 다리는 항상 턴아웃되어 있어야 한다.

발번역 3 : 프린시펄 -> 발레단 단장

발레단에서 프린시펄은 수석 무용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발레단 단장?! 학생이 ‘꿈이 발레단의 프린시펄 (수석 무용수)이 되는 거예요’라고 말 한 것을 발레단 단장이 되고 싶어하는 학생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학생은 발레단 단장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주역 등 주요 배역을 맡는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가 되고 싶은 것이다.

보면서

보는 내내 느낀 것은 우리나라에서 작품비 비싸다느니, 의상비 비싸다느니, 외국은 그 정도는 아닌데 하는 얘기가 많은데 보니까 외국이라고 특별히 나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의상이 몇백씩 하고 우리나라 작품비에 해당하는 것 같은 안무비 얘기도 나왔다. 여기서도 거기서도 전공을 하는데 매우 돈이 많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세한 비용의 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싸다’거나 ‘부담이 적다’고 할 정도는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또 한 가지 재미(?)있었던 부분은 우리나라 엄마나 일본 엄마나 아이들 교육에 대한 태도는 참 빼다박은 것 같았다. 여기에 등장한 일본인 엄마는 전형적인 교육열 높은 우리나라 엄마의 모습과 똑같았다. 줄스라는 남자 아이가 자기는 발레에 흥미가 없다고 그만 둔다고 하니 그러라고 하기는 했는데 그 뒤로는 명문대를 위해 아이를 공부시키더라…

나레이션

유투브에서 예고편을 찾으려다 보니 전편이 올라온 것이 있던데(저작권 문제가 있을텐데 안 잘리고 오래 버틸지 모르겠다) 원래 영미 개봉 버전에는 나레이션이 없더라. 설명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막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짧게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개봉 버전에서는 인터뷰같은 부분말고는 내내 나레이션으로 설명을 하는데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 ‘객석의 반응이 ~~’ 그런 류의 설명들이 굳이 필요할까?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자막이었던 부분을 대체하는 부분만 쓸모가 있고, 나머지 나레이션 중에는  쓸모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시상하는 부분에서 ‘한국의 임선우 군이 ~ 상을 받았다’는 내용이나 그 전에 임선우 군이 찍혔을 때 ‘저기 한국의 임선우 군이 보이네요’ 등의 내용을 넣고 싶어서 전체적으로 나레이션을 다 넣어버린거 아닌가 싶을 정도.

나레이션을 넣을거라면 ‘턴아웃’ 같은 것을 ‘돌아서는 동작’으로 번역하지 말고 ‘턴아웃’이라고 용어 그대로 쓴 다음에 턴아웃을 설명해주는 나레이션을 넣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마무리

적다보니 이게 영화 리뷰인지 발레 포스트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다큐멘터리로서는 어린 댄서들의 삶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의의 및 재미가 있었고 발레 매니아에게는 극장에서 어리고 재능 있는 발레 무용수를 상영내내 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반면 전문적인 다큐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부정확한 것은 영화를 들여온 측에서 성의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상영할 것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라 상영을 했다는 것 자체는 대단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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